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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도보행진 발대식을 경주 최부자집에서?

기사승인 2019.11.06  16:4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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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최부자집에서, ‘영남대의료원 노조정상화 4박5일 도보행진 발대식’ 한 이유는?

▲ 보건의료노조가 민주노총 대구본부, 영남대의료원 문제 해결을 위한 범시민대책위와 공동으로, 10월 28일 오전 11시 경주 최부자 집 앞에서 발대식·기자회견을 개최하고 있다.

영남대의료원 고공농성 120일차인 지난 10월 28일 오전 11시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위원장 나순자)는 민주노총 대구지역본부와 ‘영남대의료원 노조정상화를 위한 범시민대책위원회‘와 함께 ’경주 최부자집‘에서 발대식 및 기자회견을 마치고, ‘노동개악 저지와 영남대의료원 투쟁승리 경주–대구 4박 5일 도보행진’을 시작했다.

그런데, 왜 4박 5일 도보행진 발대식을 ’경주 최부자집‘ 고택 앞에서 시작한 것일까?

먼저, 도보행진 주최 측은 기자회견문을 통해 이렇게 밝혔다.

오늘 우리는, 영남대의료원 노조기획탄압 원상회복과 해고자 복직을 내걸고, 경주 최부자집에서 출발하여 영남대의료원까지 75km 도보행진을 시작한다.

도보행진의 출발점인 이 곳 경주 최부자집은, 가난한 이웃을 챙기고 독립운동에 헌신한 애국애족정신이 깃든 곳이자, 영남학원을 시민의 품으로 돌려주기 위한 영남학원 민주화의 상징적 장소이다.

경주 최부자집 12대손인 최준 선생이 전 재산을 쏟아 부어, 대구 시민을 위해 설립한 대구대는 영남학원의 전신으로서 군사독재시절 박정희에 의해 탈취되었고, 박정희 사망 이후 박근혜가 이사장과 이사직을 수행하다가 비리로 쫓겨난 바 있다.

이후 박근혜재단이 영남학원에 복귀하는 과정에서, 총장·학장 직선제를 폐지하는 등 비민주적 운영이 판을 쳤고, 영남대의료원에서는 노조파괴전문가를 동원한 노조기획탄압이 자행됐다.

따라서, 오늘 경주 최부자집에서 시작하는 도보행진은 영남대의료원 노조파괴공작의 피해를 원상회복하고, 해고자를 복직하기 위한 대장정의 출발점이자, 독재자에게 강탈당한 영남학원을 시민의 품으로 돌려주기 위한 영남학원 민주화의 소중한 첫걸음이다.

 

 

도보행진 주최 측의 입장을 요약하면, “경주 최부자집에서 시작하는 도보행진은 영남대의료원 노조파괴공작의 피해를 원상회복하고, 해고자를 복직하기 위한 대장정의 출발점이자, 독재자에게 강탈당한 영남학원을 시민의 품으로 돌려주기 위한 영남학원 민주화의 소중한 첫걸음”이라고 밝혔다.

▲ 경주-대구 4박 5일 도보행진 1일차 행진 모습

그렇다면 과연, 역사 속에 경주 최부자집은 영남대학교와 어떤 관계가 있었던 것일까 자세한 내용이 궁굼해 진다.

지난 10월 28일 오전 11시 경주 최부자 집 앞에서 열린, ‘노동개악 저지와 영남대의료원 투쟁승리 경주–대구 4박 5일 도보행진’ 발대식에 참석해, 영남대의료원·영남대학교와 최부자집의 관계에 대해 설명해 줬던, 이용우 영남학원민주단체협의회 공동대표가 정리한 영남대의 약사를 살펴보면, 이렇다.

<경주 최부자와 영남대학교 이야기>

마지막 경주 최부자 최준 선생은, 전 재산을 담보로 백산무역을 설립하여 독립운동을 지원하다 파산한다.

해방 이후, 조선식산은행에서 담보물을 돌려받은 재산을 비롯하여, 살던 집과 조상들의 산소가 모셔있던 선산까지 전 재산을, 다시 교육사업에 투입하여 민족교육에 헌신했다.

1. 1947년에 설립된 민립대학 대구대 설립(독립운동가이며, 상해 임시정부의 재정의 60%을 부담했던 경주 최부자 최준 선생을 비롯한 영남 유림의 공동 출연으로, 경주 교리 종가집, 조상들 묘지가 있는 선산도 기부함)

2. 1950년 최해청 선생이 시민대학으로 청구대 설립

3. 1960년 419혁명을 짓밟고 박정희는 1961년 5.16군사쿠데타로 집권한다.

최준 선생은, 대구대의 발전을 위해 삼성 이병철에게 대구대학의 재단이사장을 댓가 없이 넘긴다.

이병철은 한국비료의 사카린 밀수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대구대를 최준 선생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박정희에게 바친다.

4. 1967년 12월 15일, 영남대로 합병되는 과정은 겉으로 보기에는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진행된 것처럼 꾸몄다.

대구대학과 청구대학은 각각 이사회를 열어 두 학교의 합병안을 통과시켰고, 그 직후 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의 지휘로 영남대설립이사회가 열려 미리 준비된 합병약정서를 통과시키고, 문교부는 바로 다음날 설립인가를 내주었다.

마치,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에 의해 K스포츠 재단이나 미르재단의 설립인가가 하룻만에 나온 것과 흡사하다. 영남대의 설립이사들은 대부분 박정희 대통령의 측근이나 정권실세들이었다.

초대 이사 : 이효상, 이후락, 신현확, 김성곤 등 등 임명

5. 1968년 경산지역 교지확보 - 이후락 비서실장을 내세워 폭압적 토지 몰수

105만평 : 3억2천여만 원(토지보상 2억8천만 원/평당 265원, 5천만 원/이전 보상, 분묘이장비 등) 토지소유자 수 : 2,800명/정주민 : 130세대/분묘 4,000여기

박정희는 강제 매입한 경산 학교부지 중 10만평을 조폐공사에 매각해, 막대한 차익으로 영남대를 건설했다. 부동산 투기의 효시는 바로 박정희이다.

지금 대구의 중심가 노보텔 자리는, 원래 청구대학이 있던 자리였다. 청구대학을 건물을 세금 걷는 대구지방국세청에 매각하였다. 국가가 아주 비싸게 사립대학 자산을 매입한 것이다.

영남대는 박정희가 부일장학회를 빼앗아 이름 바꾼 516장학회<이후 ‘정수(박정희+육영수)장학회’>와 함께 훔친 장물이다. 박근혜는 그것을 유산이라고 우기고 있다.

6. 통합 이후 1979년까지 절대권력 유신독재자 박정희를 등에 업고 비약적으로 교세가 확장한다.

7. 1979년 박정희가 부하에게 총살당하고, 다시 쿠테타로 정권을 전두환의 비호 아래 1980년 4월 24일, 29세의 박근혜가 영남대 이사장으로 취임한다.

영남대 학생, 교수들은 유신잔당척결, 민주재단 건설, 학원민주화 요구하며 1만여 명이 경산캠퍼스에서 대구 대명동 캠퍼스까지 가두투쟁을 전개한다.

1980년 11월 18일 박근혜는 허수아비 이사장을 세워 놓고 이사로 수렴청정 한다.1984년~1988년 박근혜, 박근영 자매가 이사로 앉아 온갖 비리를 저질렀다.

8. 87년 6월항쟁으로 1988년 여소야대 국회가 만들어지고 사립대학에 대한 초유의 국정감사가 영남대학교에 실시되어, 박정희-박근혜가 영남대학교에 기여한 돈이 한 푼도 없다는 진실이 들어났다.

9. 박근혜 재단이 들어선 후 8년 동안, 박근혜는 영남대에 딱 한차례 방문했다. 박근혜의 비호 아래, 최태민 일가 4인방(의붓아들 조순제 영남투자금융 전무/ 조순제 아들 조용래 1987년 경제과 부정입학) 영남대 각 기관에 심어놓고, 부정축재와 부정 입학(1인당 3천만 원)를 자행했다.

하물며, 경주 최부자집 조상 묘가 안장되어 있던 선산까지 후손들의 반대에도 팔아 먹는 패륜 작태를 저질렀다.

이렇게 마련된 축재 자금이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의 종잣돈이 되었다.

10. 1988년 박근혜 재단 퇴진, 총장 직선제 등 학원 민주화를 이룩했으나, 박근혜 적폐 추종 세력을 축출과 온전한 민주성과 공공성을 회복하지 못하고, 미완의 과제로 남겼다.

11. 2005년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시절 노무현 정부에서 민주적으로 개정된 사립학교법을 재개악하는데 앞장섰다.

12. 2009년 이명박 정부에서 영남대가 임시(관선)이사회 체제에서 정이사로 전환하게 되었고 새누리당 대표이자 차기 유력 대통령 후보였던 박근혜에게 정이사 4인 추천권이 주어져 박근혜 재단이 다시 복귀했다.

13. 박근혜 재단 복귀 이후, 대학 발전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1) 영남대학교에 박정희 새마을대학원을 설립하여 박정희 우상화, 독재를 미화하는 역사왜곡에 혈안이 되었다.

2) 이사회 권한 강화와 함께 비대화, 관료화되어 대학의 각 기관에 군림하게 된다.

3) 무리한 업무지시와 독단적 학사운영개입 등 폐해가 날로 심화되었다.

14. 박근혜 재단이 다시 들어서고 2011년 4월 총장, 의료원장, 직선제 폐지되었다.

72년 역사의 영남대의 정통성은 (구)대구대, 청구대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엄청난 국고 지원으로 발전하였기에 대학의 운영권은 구성원인 교수, 학생, 직원과 국가와 지역사회에 주어져야 있다.

 

* 이용우 영남학원민주단체협의회 공동대표 ; 그래서, 독립운동 정신으로 세운 영남대. 박정희를 지우고 민족대학, 민립대학으로 거듭나야 한다.

 

 

“부자는 3대를 못 간다”는 속담이 있다.

그러나, 경주 최부자집은 1600년에서 1900년 중반까지 무려 300년 동안 12대를 내려오며 만석군의 전통을 이었고, 마지막에는 1950년  재산 전부를 스스로 영남대 전신인 대구대학에 기증함으로써, 스스로 역사의 무대 위에서 사라졌다.

경주 최부자집이 300년을 넘게 만석군 부자로 이어 갈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많은 사람들이 최부자집의 가훈에 그 열쇠가 있다고 보고 있다.

최부자집 가문이 지켜온 가훈은,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황폐해져 버린 우리 사회에 큰 감흥을 던져 주고, 모두에게 자신을 되돌아보게 한다.

 

<최부자집 가문의 가훈>

1. 절대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말라. ; 높은 벼슬에 올랐다가 세파에 휘말려 집안에 화를 당할 수 있다.

2. 재산은 1년에 1만석 이상을 모으지 말라. ; 지나친 욕심은 화를 부른다. 일만 석 이상의 재산은 이웃과 사회에 환원한다.

3. 나그네를 후하게 대접하라. ; 누가 와도 넉넉히 대접하여 푸근한 마음을 갖게 한 후 보냈다.

4. 흉년에는 남의 논밭을 매입하지 말라. ; 흉년에 먹을 것이 없어서 남들이 싼값에 내 놓은 논밭을 사서 그들을 원통하게 해서는 안 된다.

5. 최 씨 가문에 며느리들이 시집오면 3년 동안 무명옷을 입혀라. ; 내가 어려움을 알아야 다른 사람의 고통을 헤아릴 수 있다.

6.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 특히 흉년에는 양식을 풀어 이웃에 굶는 사람이 없게 하라.

* 경주 최부자집 300년 부(富)의 비밀 중에서

 

* 경주 최부자집 300년 부(富)의 비밀 중에서최부자 가문의 마지막 부자였던 최준(1884-1970)선생의 결단은, 또 하나의 인생 사표(師表)이다.

백산상회를 세워 독립자금을 지원했던 그는, "재물은 분뇨와 같아서 한 곳에 모아 두면 악취가 나 견딜 수 없고 ,골고루 사방에 흩뿌리면 거름이 되는 법이다"라는, 노스님에게서 받은 금언을 평생 잊지 않았다고 한다.

▲ 박문진 보건의료노조 지도위원이 70미터 옥상에서 두손을 들고 조합원들에게 답하고 있는 모습

한편, 해고자 보건의료노조 박문진 지도위원은 영남대의료원 옥상에서 129일째(홀로 22째) 고공농성 중이다. 매일 500배 절을 하는데 13일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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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선 kingsj8782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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