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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심과 섬김, 돌봄, 그리고 대상에 대한 인식 방법의 전환

기사승인 2023.11.27  11: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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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심, 섬김, 돌봄은 인간의 인간에 대한 의무. 이를 받는 것은, 권리가 되어야

이승무

순환경제연구소 소장

(전)노동당 정책위원

노동당 생태평화위원회 운영위원

모심이라는 것은, 같은 주거생활 공간에서 같이 살면서 자기보다 높다고 생각되는 존재가 품위 있게 지낼 수 있도록 삶의 공간을 확보하고 배정하여 지켜주고 몸과 마음을 써서 돕는 것을 말한다.

대궐 안에서 내시나 궁녀들, 대통령 관저에서 경호원들이 그런 일을 하는 것이다. 자식이 부모를 봉양하는 것도 모심에 해당한다. 여기서는 핵심적인 덕목이 공경(恭敬)일 것이다.

섬김이라는 것은 사회적, 역사적으로 굳어진 위계질서 안에서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지배력과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말한다.

임금과 신하의 관계에서 대국과 소국과의 관계에서,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신하, 소국, 종은 임금, 대국, 주인을 섬기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적인 가치는, 충성(忠誠)일 것이다. 모심과 섬김의 차이는 모심을 소홀히 한다고 해서 중간에 개입된 다른 관리자로부터면 몰라도 바로 모심의 대상인 윗사람의 응징을 당하지는 않지만, 섬김의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물리적인 응징을 당하게 된다는 점이다.

돌봄이라는 것은, 어린 아기와 같이 자기 혼자 힘으로 의식주를 해결할 수도 없고 거동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약자를 보호하고 위해주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적인 가치는 자비(慈悲)일 수 있겠다.

그런데 돌봄은 동물계에 속한 포육(哺育)을 행하는 많은 생명체에게 거의 본능적으로 충동으로 자리 잡고 있다.

섬김은 군거(群居) 사회를 이루는 유기체들에서 성별 간에 그밖에 불평등한 위계질서가 생겨나고, 이것이 인간사회에까지 내려오면 사회의 발달에 따라 질서 유지의 기본이 되는 것이다.

모심은 본능적, 강제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도덕적인 성격, 인간적인 품위에서 나오는 측면이 강하다. 이는, 반드시 섬김보다 더 나중에 발생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반드시 인간에게만 발견되는 것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돌봄의 윤리가 가장 먼저 나왔다고 할 수 있다. 맹자에 나오는 환과고독(鰥寡孤獨)에 대한 돌봄,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고아와 과부에 대한 배려 이런 것들이 본능적인 자식 돌봄을 넘어서 사회적인 의무가 된 것이다.

섬김 그 자체는, 위계질서를 가진 사회 안에서 상당히 강압적인 상명하복의 윤리가 된다. 그것이 진정한 윤리적 덕목이 된 것은 한참 뒤인 예수 시대에 섬김이 상명하복의 일방적 섬김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몸을 낮추어 오히려 사회에서 비천한 사람들을 섬기는 일을 자처하는 역설적인 사랑의 윤리로 등장한 것이다.

모심은 동양에서는 효(孝)의 윤리로 일찍부터 자리 잡았다. 그것은 본능적 충동에 속한 것도 아니고, 강제적 위계질서에 속한 것도 아닌 상당히 윤리적인 성격이 강한 것이다.

이것은 같은 생활공간에 높은 사람과 공존한다는 점에서 특히 동학(東學)에서는 나중에 자기 몸에 신(神)을 모신다는 시천주(侍天主)라는 종교적인 의미로 발달하기도 했다.

모신다는 말은 이처럼 어떤 존재에게 그 존재의 품위에 걸 맞는 일정한 거처할 공간을 마련해 주고 이에 따른 편의를 제공하는 자발적인 의사결정과 행위를 내포하고 있다.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 선생은, 삼경(三敬)의 윤리를 제시하여 천(天)과 인(人)과 물(物)을 공경하여 모실 것을 주장한다.

집안살림에 매여 있는 가정주부는 시부모를 모시고, 남편을 섬기고, 자식을 돌보는 세 가지 일을 다 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

가정주부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으로 유지되는 남성위주의 사회가 실질적인 물적인 모심과 섬김과 돌봄을 어머니와 여성의 영역으로 국한시켜 놓은 상태에서 이들의 헌신에 경의를 표하는 위선적인 상태를 깨고, 그런 행위들을 사회경제적인 장으로 해방시킬 때가 되었다.

경제를 말하는 ‘에코노미’라는 말의 어원인 그리스어의 ‘에코노미쿠스’는 집안의 모든 일들을 돌보는 종을 의미한다. 경제는 이처럼 돌보고, 섬기고, 모시는 일에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경제는 모든 식구들을 돌보고, 섬기고, 모시는 활동이다. 집안의 부(富)를 증대시키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고, 모든 식구들을 잘 살 수 있게 돕는 활동인 것이다.

모심과 섬김, 돌봄의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전제는 그 대상이 되는 존재에 대한 세심하고 예리한 관찰이다. 안색과 음성, 기분, 건강상태에서의 이상을 잘 살펴서 이에 적절히 대처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런 것이 경제와 관련된 활동이라고 하면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활동을 기본으로 하는 것이 경제관리라고 할 수 있다. 수입에서 비용을 뺀 이윤을 최대화하는 경제 논리는 문화적, 역사적으로 생소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것을 경제학이라고 해서 연구하고 가르치고 배운다. 이는 다른 존재들을 대상으로 삼고 이들을 이용하고 희생시켜 나의 부(富)를 최대화하는 것으로서 모심과 섬김, 돌봄에 역행하는 방향을 띤다.

낡은 가게에서 잡화물품을 먼지떨이로 털면서 가게를 지키는 영세 상인은, 돈 많은 사람들에게는 하찮아 보이는 상품들이 좋은 사람을 만나서 팔려나가길 기다리면서 그런 상품의 진가를 사실상 알아주는 몇 안 되는 사람에 속한다.

밭에서 채소나 그 밖의 농작물을 기르는 농부들은 그 생산된 농산물을 1차적으로 가장 아끼는 사람이다.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상공인이나 점원, 작은 땅을 경작하는 농부일수록 아주 작은 수공업적인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일수록, 물건인 상품들과 가까이에서 그것들을 돌보고 그것들에 마음을 쓰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경제 구조에서 주변화되어 있고 힘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민들의 삶을 가장 잘 알고 서민들의 필요에 직접적으로 응답하는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돈을 버는 과정 자체가 돌봄이고, 자신이 업주의 입장에서 고용한 점원들을 섬기고 모시는 일이고, 돈을 버는 목적이 가족의 돌봄인 것이지, 돈 자체를 모으는 재미나 욕심은 사실상 거리가 먼 이야기다.

그런 미약해 보이는 경제주체들의 마음과 태도에 희망의 씨앗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이미 지금의 문명에서도 정부의 공직자들은 백성을 섬기는 사람들로 원칙상 자리매김되어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힘과 돈을 가진 사람들은 섬김과 모심을 받는 사람들이다. 기업체에서 이 관계가 역전되어 기업주가 종업원을 모시고 섬기고 돌보게 되는 것, 그리고 직접 물건을 다루는 노동자가 물질을 다루어 제품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물자를 낭비하거나 남용하거나 하지 않고 돌봄의 정신으로 생산을 하고 상인이 그렇게 만들어진 상품을 잘 모시고 돌보게 되는 것은 같은 변화의 방향이라고 보인다.

위정자가 백성을 섬기는 자여야 한다는 것은 공허한 미사여구로 권력을 차지하려는 술수로 동원되는데, 사실 그 섬긴다는 말 자체가 권력관계를 내포하는 말이라는 것, 그것을 뒤집는 민주와 민본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것 말고는 별다른 내용성이 없다.

그와 달리 백성을 모셔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는 백성들에게 품위 있는 생존을 위한 공간과 수단을 확보해 주어야 한다는 말로 발전할 수 있다.

모심과 섬김, 돌봄을 모두 합쳐서 살림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경제’란 모든 주체들, 모든 식구들, 나아가 만물을 살리는 활동이기에 ‘다 살림’이라고 한글로 번역할 수 있다.

이를 주관하는 집안의 종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이런 활동들은 모든 식구가 서로에 대해서 하는 활동이 되어야 하니 서로 모심, 서로 섬김, 서로 돌봄이 되어야 하는 것이고 다 살림도 서로가 다 잘 살도록 돕는 개념이 될 것이다.

특히나 예수의 윤리에서 섬김의 상하관계를 역전시키고, 최시형의 윤리에서 모심을 만물로 확장한 것처럼 새로운 시대로 가야 하는 입장에서는 상하 신분의 위계질서를 배제한 것으로서, 보편적인 인권 개념이 이렇게 재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모심, 섬김, 돌봄은 인간의 인간에 대한 의무이면서 이를 받는 것은 권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것을 기본적인 인간 본성에 잠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고 이를 장려하고 키워내는 교육을 해서 이러한 태도를 전제로 생산과 소비의 경제활동을 할 수는 없을까?

이를 너무 엄격한 도덕성으로 보고 이를 전제로 하는 사회를 구상하는 것은 비현실적이고 굉장한 독재나 강압, 폭력을 가져올 것으로 우려할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는 우선은 문화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여기서 살펴봄(照顧, 돌봄을 의미하는 중국어)과 관조(觀照)의 가치를 말하고 싶다.

본다는 것은 듣는다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듣는다는 것은 발화된 내용, 보고되고 전달되는 내용을 접수하는 일이다. 이에 반해 본다는 것은 눈앞에 펼쳐지는 현상을 목격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책을 보거나 글을 읽는다는 것은 오히려 듣는 것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즉 봄은 상(像)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고, 들음은 전달되는 내용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모심, 섬김, 돌봄은 사무적으로 될 수 있는 행위가 아니기에, 보고되고 전달되고 듣는 사항에 따라 대처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살펴봄을 통해서만 적절하게 대응이 될 수 있다.

그런데 그 살펴봄에서 일말의 긍정적인 면, 아름다움에 속하는 것을 볼 수 있는 역량이 되지 않는다면, 그 모심, 섬김, 돌봄은 견딜 수 없는 것이 되고 형식적이 되고 결국 실패하게 된다.

돌봄의 대상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역량은, 예리한 관찰력만이 아니라 돌봄 주체의 상당한 정신적 건강과 윤리적 태도에 좌우된다.

이런 정도의 태도와 내적 건강을 가진 주체들을 길러내는 것이 다살림의 경제의 필요조건 중 하나다.

생명을 가진 모든 것에서 긍정적인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병들고 아픔으로 짜증을 내는 그런 대상에게서 긍정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해 내는 것이 쉽게 가능할 수 없다.

자기를 그 처지에 대입하는 역지사지와 동일시의 연습, 자기반성이 아니면 불가능할 수 있으며, 이는 많은 재충전과 쉼과 또한 나 자신도 타인으로부터 돌봄을 받음을 필요로 할 수 있다.

구체적인 인간과 인간의 삶, 인간이 만든 것들, 생명을 가진 것들, 생명을 지탱해 주는 모든 자연만물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이 어떤 기준에 따라 파악한 것을 가공한 제출된 보고서를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바라봄을 통해 마음이 움직이고 마음을 쓰게 되고 그러면 새로운 방향으로의 전환이 시작될 수 있지 않을까?

만물의 본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지금의 건강상태와 그 미적인 모습이 훼손된 상태를 인식하려는 노력은 마음이 뒷받침될 때라야 가능하다.

그러나, 그런 과정을 거쳐서라도 봄을 통한 아름다움과 건강을 살피는 인식이 가능하다면, 다살림의 동력이 생길 가능성이 있다.

우선은 직접 봄과 살펴봄을 들음이나 읽음보다 우선시하는 인식론의 전환이 요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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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무 sngmoo@cycleconomy.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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