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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洪世和)

기사승인 2024.04.23  14:4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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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세화는 학습협동조합 이름처럼 ‘소박한 자유인’이었다

김흥순

글로벌인간경영연구원 원장

전 대한법률경제신문사 대표

홍세화를 알게 된 것은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1995)를 읽고 부터다.

이야기는 그가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에게 들은 일화에서 비롯된다.

서당 선생이 3형제에게 장래희망을 묻는다. 서당 선생은 ‘정승’이 되겠다는 맏이, ‘장군’이 되겠다는 둘째를 칭찬하며 막내를 쳐다본다.

막내는, 장래희망을 말하는 대신 ‘저보다 글 읽기를 싫어하는 큰형에게 개똥 세 개 중 하나를, 저보다 겁이 많은 둘째 형에게 개똥 하나를 입에 넣어주고 싶다’고 한다.

마지막 개똥은? ‘당연히 서당 선생에게’라고 답한다.

할아버지는 ‘살아가며 세번째 개똥이 서당 선생 몫이란 말을 하지 못하게 될 때, 그때는 네가 그 세번째 똥을 먹어야 한다’고 했고, 어린 홍세화는 수긍했다.

남민전 사건에 연루돼, 군사독재 박해를 피해 프랑스에 망명했다가 23년 만에 고국땅을 밟았을 때 그는 ‘서오남’ 55세였다.

그는 처음 ‘다름을 차별과 억압의 근거로 삼아선 안 된다’는 프랑스식 톨레랑스를 이야기하며 다소 온건하게 출발했다.

그랬던 그의 목소리는 갈수록 급진화됐다.

1947년 12월 10일~2024년 4월 18일

작가, 사회운동가, 언론인, 정치인, 소박한 자유인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한 후, 1979년에 벌어진 남민전 사건에 연루돼 프랑스로 망명했으며, 프랑스 망명 생활 중에 쓴 책인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의 저자로 유명하다.

2002년 대한민국으로 영구 귀국해 언론인, 작가, 교육인 등으로 활동하였다.

한겨레신문 기획위원, 아웃사이더 편집위원 등을 지냈으며 2013년 계간지 <말과활>을 창간했다. 2011년에는 진보신당(노동당의 전신) 당대표를 역임하기도 했다.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사건은, 유신 말기 박정희 정권의 최대 공안사건이다. 공안당국은, 1979년 11월 ‘반독재민주화 반외세’를 기치로 결성된 지하 비밀조직인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관련자로 고 김남주 시인 등 80여명을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등 위반 혐의로 체포했다.

2006년 3월, 노무현 정권에서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가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사건 관련자 중 29명을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했다.

남민전 주도자로 사형 선고를 받고 1981년 옥사한 이재문과 1982년 사형당한 신향식은 제외되었다.

홍세화 씨는, 이 사건이 알려지기 전 모 기업의 프랑스 파견 직원으로 프랑스에 갔다가 이 사건이 알려진 뒤 프랑스로 정식으로 망명하였다.

홍세화 처지에서 바라본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사건과 관련된 이야기는 후일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에 실렸다.

주요관련자는 이재문, 신향식, 김병권, 이문희, 이재오, 임헌영, 안재구(장손 KBO 리그 NC 다이노스 소속 투수 안인산. 할아버지가 지어주셨다. 수학자라 구속되었을 당시에 세계 수학자들이 항의를 했다), 차성환, 이수일, 김남주 시인, 홍세화, 최석진(崔錫鎭/ 법륜 스님의 친형. 고려대학교 경영대학 경영학과 졸업 후 당시 한국경제개발협회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었다) 등이다.

1947년 12월 10일 서울시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재일 조선인 아나키스트였으며, 해방 이후 귀국해서 가족을 꾸렸다.

이름 “세화”는 “세계평화”라는 뜻으로 붙여준 것이다.

홍세화는 충청남도 아산군 염치면에서 유년기를 보내다가, 3살 때였던 1950년 9월 황골 새지기 학살사건을 겪었다.

이후 창경국민학교, 경기중학교,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여 1966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금속공학과에 입학하였으나 1967년 10월 자퇴하였다.

그 뒤, 재수로 1969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외교학과에 입학하였고, 이후 문리대에서 연극반 활동을 하였다.

1972년에 '민주수호선언문' 사건으로 제적되었다가 복학하였으며, 1977년에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외교학과를 졸업했다.

1977년부터 '민주투위' 조직과, '남민전' 조직에 가담하였고, 이후 무역 회사에 입사, 1979년 3월 무역회사 해외지사 근무 차 유럽으로 건너갔다.

남민전 사건으로 프랑스 체류 중 망명하였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에 따르면, 프랑스 정부로부터 사상의 자유 침해에 따른 망명자로 인정받았고, 1982년 이후 관광안내, 택시운전 등 여러 직업에 종사하는 망명 생활을 하며 집필, 기고활동에 종사하였다.

1995년 자서적 고백인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발간하고, 1997년 《르 몽드》에 실린 기사 묶음인 〈진보는 죽은 사상인가〉를 번역하여 출간했으며, 1999년 문화비평 에세이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를 펴냈다.

2000년 단행본 《아웃사이더를 위하여》, 격월간 《아웃사이더》지의 발간에 참여하였다.

2002년에 대한민국으로 영구 귀국하여 《아웃사이더》 편집위원으로 선임되었고, 2002년 1월 한겨레신문의 기획위원에 선임되었으며 이후 언론, 강연 등의 활동을 했다.

2010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대한민국판 편집장이 되었고, 2010년 민주노총과 한신대학교에서 기획한 노동자 대학에서 강의를 맡기도 했다.

진보신당의 당원으로 활동하다가 2011년 11월엔 <진보신당>의 당 대표로 선출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진보신당 비례대표 후보 2번(1번 김순자, 2번 홍세화, 3번 이명희, 4번 정진우, 5번 장혜옥, 6번 티코노프 블라디미르(박노자), 7번 박은지)으로 출마하기도 하였으나 득표율 1.13%를 기록하면서 낙선했다.

2013년 계간지 <말과활>을 창간했다.

이후, 2015년 벌금형을 선고받고 돈을 내지 못해 옥살이해야 하는 사람들을 구제하는 비영리 사회단체 일명 '장발장 은행'의 은행장으로 재직했다.

2023년 2월부터 전립선암으로 투병해 오다가 2024년 4월 18일 사망했다.

한겨레신문 재직 이력으로, 장례는 한겨레 사우장으로 진행됐다.

 

 

(저서)

《생각의 좌표》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빨간 신호등》

 

(공저)

《거꾸로 생각해봐! 세상이 많이 달라보일걸》

《왜 80이 20에게 지배당하는가?: 작은책 스타가 바라본 세상)》

《21세기 첫 십년의 한국: 우리시대 희망을 찾는 7인의 발언록)》

《진보가 보수에게: 민주노동당의 희망과 약속》

역서

《세계는 상품이 아니다》 (조제 보베, 프랑수아 뒤푸르 지음)

《인종차별, 야만의 색깔들》 (타하르 벤 젤룬 지음)

《보거를 찾아 떠난 7일간의 특별한 여행》 (질베르 시누에 지음)

《진보는 죽은 사상인가》 (막스 갈로 지음)

《민주주의의 무기, 똘레랑스》 (필리프 사시에 지음)

 

(가족)

아버지: 홍승관

부인: 박만선

자녀: 홍수현, 홍용빈

 

 

 

나는 내 생각의 주인인가?

이 말은 홍세화가 강연을 시작하기 전에 청중들에게 하는 질문이다.

그리고 이 질문에는 두 가지의 질문이 포함되어 있다.

정말로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은, 온전히 본인 스스로 선택 및 판단을 하고 있는 것인가? 주변 환경이 나의 생각에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나? 라는 질문들이다.

생각의 좌표에서 그는 이런 말을 한다.

내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나?”라는 질문이다. 내가 지니고 있는 생각의 뿌리를 살펴보자는 것! 물음은 꼬리를 문다. 과연 나는 내 생각의 주인인가? 내가 주인이 아닌 내 생각들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내가 주체적으로 걸러내지 못한 부모의 요구나 주류 사회의 통념이 내 생각의 자리에 대신 똬리를 틀고 들어서 있는 것은 아닌가?

사회적 약자들은 왜 강자의 논리를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가? 주인 없는 생각이 넘쳐나는 까닭은 개인의 게으름이나 무지 때문인가, 아니면 시스템, 즉 미디어 환경이나 교육 제도의 문제인가?

이렇듯 개인적 성찰은, 자연스럽게 한국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비판적 성찰로 이어진다.

특히 그가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은 ‘사유하는 자’가 아닌 ‘암기 잘하는 자’를 양산하는 교육 체계에 대한 비판이다.

암기 능력을 기준으로 일등부터 꼴등까지 줄을 세우며, 경쟁을 부추기는 한국의 교육 시스템이, 자신의 존재나 처지를 배반하는 의식을 내면화시키는 주범이기 때문이다.

홍세화는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선 생각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생각의 길을 잃어가는 이 땅의 젊은 벗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편지글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이 비판적 안목을 지닌 ‘사유하는 인간’으로 발걸음을 딛는 작은 실마리라도 얻으면 좋겠다는 것이 그의 소박한 바람이다.

홍세화에게는 두 가지 우연이 있다.

하나는 프랑스 땅에 떨어진 것.

다른 하나는 파리에서 빈대떡 장사를 할 자본이 없었다는 것.

아무 카페든지 한 귀퉁이를 빌려서라도 빈대떡 장사를 해보겠노라고 마누라와 꽤나 돌아다녔다. 그때 수중에 돈이 좀 있었다면 지금도 열심히 빈대떡을 부치고 있을지 모른다. 실제로 나는 빈대떡을 아주 잘 부친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 대신에 나는 빠리의 빈대떡 장사'? 글쎄, 그건 나도 알 수 없다. 아무튼 두 가지 우연과 몇 가지 필연, 그리고 서울대 출신이란 게 합쳐져서 지금의 내가 있게 되었다. 나는 나이를 꽤나 먹었지만, 나이 먹기를 꽤나 거부하려고 한다.

『양철북』의 소년도 아니면서 말이다. 나이 먹기를 거부한다는 게 주책없는 일임을 안다. 그렇다고 하릴없는 수작이라고까지는 생각지 않는다. 장교는 나이를 먹으면서 진급한다. 사병은 나이를 먹어봤자 사병으로 남는다.

실제 전투는 주로 사병이 하는 것이다. 그런데 거의 모든 사람이 사병으로 남으려 하지 않는다. 그래, 그럼 나는 끝까지 사병으로 남겠어. 오래 전부터 가졌던 생각이다. 따라서 나에겐 나르시시즘이 있다.

내 딴에는 그것을 객관화함으로써 자율통제 하려고 애쓴다. 그러면 전투는 왜 하는가? 살아야 하므로. 척박하나 땅에서 사랑하고 참여하고 연대하고 싸워 작은 열매라도 맺게 하는 거름이고자 한다.

거름이고자 하는 데에는 자율 통제가 필요치 않다. 욕망이 춤춘다. 그렇다. 나는 살아서 즐거운 '아웃사이더'이고 싶다. 시어질 때까지 수염 풀풀 날리는 척탄병이고 싶다.

많은 이들이 돈의 노예가 됐고 가지지 못한 이들의 비참함이 극에 달한 한국 현실을 겪으면서다. 그는 언론인으로 몸담으며 작년까지 글을 썼던 한겨레를 향해 ‘프티부르주아 신문’이란 쓴소리도 주저하지 않았다.

말에 그치지 않았던 사람이다.

징역형보다 가벼운 벌금형을 선고받고도 가난하기 때문에 다시 교도소에 갇히는 사람들과 연대하고, 그 부조리함을 고발하고자 장발장은행을 만들었었다.

홍세화는 부단한 저술·번역과 활동을 통해 불온한 사상을 퍼뜨리며, 기성체제와 불화하고, 동시에 약자와 연대하는 삶을 살았다.

그가 ‘가장자리’를 자처하며 어려운 길만 걸었던 건, 자신이 난민과 이주노동자로서 살았던 경험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승에서 “할아버지, 그래도 개똥을 적게 먹으려고 무척 애썼어요”라고 말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공부하며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려 했던 학습협동조합 이름처럼 ‘소박한 자유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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