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맨해튼 프로젝트, 부도덕한 최종병기 원자폭탄 투하
당시 세계는 1943년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 독립을 결의하였다.
일본의 진주만 폭격으로 전쟁에 어쩔 수 없이 뛰어든 미국은 신속히 전시비상 체제로 들어가 승리를 위해 총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미국은 이미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세계 제일의 강대국으로 부상했지만, 전시동원 체제에서 드러난 미국의 잠재력은 실로 엄청났다.
모병과 징병을 통해 순식간에 1천만 전투 인력이 확보되었다.
기간산업이 모두 군수 산업으로 전환되어 전쟁 물자들이 엄청난 양과 속도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연합국이 대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루스벨트, 처칠의 탁월한 지도력, 아이젠하워, 맥아더 같은 전쟁 영웅의 전투 지휘력, 군인과 국민들의 애국심 등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미국의 경제적 잠재력이었다.
1941년 말 미국이 전쟁에 뛰어들었을 때, 이미 연합국의 승리는 보장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미국은 일본 때문에 참전하게 되었지만 전쟁에서 실제 힘을 더 기울인 지역은 태평양이나 아시아가 아닌 유럽이었다.
일본은 중국과 아시아 전역에서 이미 힘을 소진해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 직접적 위협을 가할 여력이 없었다. 러시아를 무리하게 침공하면서까지 최후까지 저항하던 히틀러는, 연합군이 베를린을 포위해오자 1945년 4월 30일 지하 벙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5월 7일 독일의 무조건 항복으로 유럽에서의 전쟁은 끝났다.
일본 군부가 미국의 항복 요구를 완강히 거부하고 무모한 항전을 계속하는 바람에 결국 일본은 그때까지 미국이 숨겨왔던 최후의 비밀 병기, 원자폭탄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기고만장했던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1945년 8월 6일 오늘은, 만감이 교차하는 날이다.
오전 8시 15분, 최초의 핵무기인 "리틀 보이"가 일본 본토 히로시마 상공 580m에서 폭발하였다.
한편, 일본 히로시마 원자폭탄 리틀 보이(Little Boy) 투하일과 멈추어진 시계와 친일 족속들과 아직도 같은 시대를 살기 때문에 슬프다.
8월은 우리를 격동하게 한다.
8월이 되면 우리는 우리스스로를 자책하기도 하고 회한도 든다.
일제시대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일제강점기 한국인은 처절하게 당했다.
태평양 전쟁 막바지 일제에 의해 군대와 공장, 광산으로 끌려갔던 조선인 강제징용 현장에 대한 추모와 기념의 공간이 일본 곳곳에 남아 있다.
양심적 일본 시민사회와 재일조선인들의 소중한 노력으로 그나마 묻힐 뻔했던 역사적 사실이 복원된 것이다.
하지만, 정작 한국 정부의 관심은 여전히 부족한 편이었다. 국내도 가해자와 동조자들의 힘과 자본이 살아있어 사실 처절한 내용이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대정권들은 일제 부역자들에 대한 처벌을 아예 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솜방망이 정도였다.
독일은 스스로도 반성하고 아직도 처벌을 하고 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다.
직접 책임이 없는 간접 책임의 96세 나치 전범(戰犯)이 72년 만에 감옥으로 갔던 '아우슈비츠 회계원' 오스카 그뢰닝이 2018년 3월 9일 사망한 뉴스를 보았다.
"죄책감은 느껴도 법적 책임 없다"고 나찌 전범은 오늘날 한국의 매국노들처럼 말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끌려온 유대인의 돈을 세는 업무를 담당했던 나치 친위대(SS) 대원 오스카 그뢰닝이 종전(終戰) 72년 만에 감옥에서 죗값을 치렀다.
그뢰닝은 지난 2015년 재판에서 4년형을 선고받았지만 고령(高齡/ 당시 94세)을 이유로 수감 생활이 어렵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독일 연방 검찰은 "그뢰닝의 건강 상태를 확인한 결과 충분히 수감 생활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며 그뢰닝 변호인 측의 수감 유예 요청을 기각했다.
그뢰닝 재판은 유대인 학살에 직접 가담하지 않은 경우에도 전범(戰犯)으로 처벌할 수 있다고 판결한 사례로, 국제적인 관심을 끌었다.
그뢰닝은 1942~44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근무할 당시 강제로 끌려온 유대인에게서 뺏은 돈을 세고, 이를 베를린 나치 본부에 보내는 일을 맡았다. 이 때문에 재판 과정에서 그뢰닝은 '아우슈비츠의 회계원'으로 불렸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선 유대인 등 150만~300만 명이 가스실 등에서 살해됐고, 그뢰닝은 이 중 30만 명의 학살을 방조하고 도운 혐의를 받았다.
검찰은 "1944년 5~6월 헝가리 유대인 42만5000명이 아우슈비츠로 보내졌고, 이 중 30만 명 이상이 가스실에서 처형됐다"며 "그뢰닝도 종범(從犯)으로 이 학살에 책임이 있다"고 했다.
그뢰닝은 재판에서 "유대인을 직접 살해한 적이 없다"며 "도덕적 죄책감을 느끼지만 법적 책임은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된 사람들의 돈을 모으고 계산함으로써 나치 정권의 대량 학살을 도운 혐의가 인정된다"고 유죄를 선고했다.
한국도 전범을 끝까지 i아 처벌받게 하고 법으로 다스려야 한다.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된 핵폭탄에 부여된 코드명 리틀 보이(Little Boy), 윈스턴 처칠은 “분노한 신의 두 번째 강림”이라 말했다.
“오 하느님, 우리가 지금 무슨 일을 저질렀나이까?” 최초의 원폭공격기에서 진홍색 섬광을 본 에놀라이 게이 부조종사 로버트A 루이스 대위의 탄식이었다.
1945년 8월 6일 오전 2시 45분 미국의 B29 폭격기 에놀라이 게이호는 태평양 매리애나 군도 티니안 섬에서 이륙했다. 에놀라이 게이호는 기장 폴 티베츠대령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다.
에놀라이 게이호 12명의 승무원 가운데 마지막 생존자였던 시어도어 판커크 중위(항법사)가 7월 29일 미국 조지아 주 자택에서 93세로 숨짐으로 원자탄 투하자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
일본은 원자탄 투하일을 평화의 날로 부른다.
일본은 투하자들로부터 후회한다는 말을 듣고자 했다.
“리틀보이로 전쟁을 빨리 끝내 더 많은 인명손실을 막을 수 있었다” - 판커크
“승무원 가운데 원폭 투하작전에 참여한 사실을 후회했던 사람은 없다” - 폴티베츠
마지막 생존자의 죽음으로 그동안 집요하게 사과와 유감 표명을 요구해온 일본의 희망은 완전히 사라졌다. 원폭 사용 결정 책임을 놓고 끝없는 논쟁이 이어져왔다. ‘전쟁을 다른 방법으로 막을 수 없을까’는 지금의 이야기다.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 원자폭탄 리틀 보이(Little Boy) 투하일과
투하시간에 멈춘 시계
히로시마 평화 기념 공원 내 평화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시계가 원자폭탄 투하 시간인 8시 15분을 가르킨 채 멈춰 있다.
이 시계는 당시 59세였던 켄고 니카와 씨의 것으로 일을 하러 나서던 니카와 씨는 당시 원자폭탄 폭심지에서 약 1600m 거리에서 폭격에 노출되었으며, 원자폭탄 투하 16일 후인 8월 22일 사망했다.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미군 폭격기의 히로시마 원폭 투하로 7만여 명이 현장에서 사망한 것을 포함해 그해 말까지만 약 14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재일본대한민국민단 히로시마현 지방본부는 한인 희생자 수를 지금까지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보다 훨씬 많은 2만 명 이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히로시마 한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는, 1970년 평화기념공원 밖에 세워졌다가 1999년 공원 안으로 이설됐다.
1945년 이후 핵무기가 전쟁에서 다시 사용된 일은 없다.
그러나, 지금 세계 각국이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의 양은 지구를 송두리째 몇 번을 파괴하고도 남을 정도이며, 핵무기의 또 다른 사용은 곧 인류의 공멸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당시 미국이 전쟁 종식을 위해 불가피하게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핵무기가 인류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급박한 현실로 다가온 지금 미국의 행위는 분명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충분한 소지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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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순 jwd3222@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