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인숙 암살사건은, 50년이 지난 지금도 회자되는 의문투성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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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흥순 글로벌인간경영연구원 원장 사단법인 세계호신권법연맹 부회장 (전)대한법률경제신문사 대표 |
예나 지금이나 부정부패 3대 요소는 섹스, 여자, 돈이다.
한국에서는 섹스스캔들이 부정부패의 최고 하이라이트다.
1971년 대통령 선거 전에 민주공화당 박정희 후보가 정인숙 이슈 때문에 곤란에 처했던 사례가 그것이다.
당시 언론 보도를 종합해 사건을 들여다보면, 1971년 4월 대선 및 5월 총선을 1년여 앞둔 1970년 3월 17일 화요일 밤 10시 55분쯤이었다.
호텔에서 나온 요정 직원 정인숙(鄭仁淑 / 당시 만 25세)은 오빠 정종욱이 모는 코티나 차를 타고 인근의 서울 마포구 서교동 집으로 향했다.
집 근처에서 두 괴한이 나타나 차를 세우고 뒷좌석에 있던 정인숙의 머리와 가슴을 총으로 쏴 살해했다.
범인들은 정종욱을 협박해 한강 쪽으로 차를 몰도록 했고, 이 차는 한강 북쪽 강변3로(지금의 강변북로 일부)를 잠시 달리다가 제2한강교(양화대교) 부근인 절두산 근처에서 멈춰 섰다.
오늘날의 잠두봉 지하차도가 끝나는 부분(일산 방향)이었다.
정지된 차에서 또다시 총성이 울려 퍼졌다. 지나가던 운전자가 경찰에 신고했고, 뒷좌석의 정인숙은 숨진 채로, 운전석의 정종욱은 신음하는 채로 발견됐다.
이 사건은 50년이 지난 지금도 회자되는 의문투성이 사건이다.
세상의 주목을 끌게 된 것은 이른바 '정인숙 리스트' 때문이다.
리스트는 이후의 장자연 리스트든 뭐든 엄청난 파장을 부른다.
수사 과정에서 발견된 수첩에서 정권 고위층들의 연락처가 발견된다. 대통령 박정희, 국무총리 정일권,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 등이 힘있는 사람들의 이름이 기재돼 있었다.
정인숙은 일반 살인사건 피해자와 달리 한국에서는 일어나기 어려운 총기 사건이었다.
특별한 처지에 놓였던 여성이라는 느낌을 주는 피해자였다. 그런 그에게 3살짜리 아들이 있었다. 세상은 수첩에 적힌 누군가가 아이의 아버지일 거라고 수군댔다.
박정희나 정일권이 유력하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김경재가 박사월이라는 필명으로 쓴 김형욱 회고록 <혁명과 우상>은 "한때 서울문리사대를 다니던 문학가 지망의 여학생으로 극작가 장 모와 사랑에 빠졌다가 실연의 상처를 안고 돌아서서 인숙으로 이름을 바꿨다"라며 "그때부터 빼어난 미모를 이용, 비밀 요정에 나오기 시작했다"라고 한 뒤 "1968년 말, 아버지가 불분명한 사내아이를 낳은 정인숙은 갑자기 해외여행 수속을 밟기 시작했다"라고 말한다.
정인숙은 1969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런 뒤 10월 미국으로 날아갔다. 그랬다가 이듬해 1월에 귀국했다.
귀국 2개월 만에 위 사건이 생긴 것이다.
누가 살인범인지, 누가 아이 아빠인지를 떠나 이 사건은 박정희 정권 악재였다.
리스트에 거론된 남성들이 정권 핵심들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박 정권의 부담은 '시점'으로 인해 한층 가중됐다.
1970년은 전년도에 3선 개헌을 관철한 박 정권이 장기 집권으로 나아가는 길목이었다.
1967년 대선에서 제2기 집권에 성공한 박정희는 1971년 대선을 통해 3선 고지에 도달하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악재가 돌발했다.
야당 역시 어느 때보다 위기감이 고조돼 있었다.
4·19 혁명 1년 뒤에 등장한 군인들이 군부독재정권을 수립하는데 그치지 않고, 프랑스 대혁명 때의 나폴레옹처럼 총통제를 추진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야당의 집권 가능성을 급속도로 떨어뜨리는 정세 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 조선왕조실록처럼 만천하에 밝혀질 제3공화국 섹스스캔들이 터진 날이다.
1970년 3월 17일 밤 11시경, 서울 마포구 합정동 절두산 근처 도로에서 발생한 교통사고를 가장한 살인사건이었다.
제3공화국 당시의 의문사로 고급 요정 종업원인 정인숙이 교통사고를 가장한 사고에 의해 암살된 사건이다.
피해자 정인숙(본명: 정금지)은 총상으로 사망하였고 그의 차를 운전하던 넷째 오빠 정종욱은 넓적다리를 관통 당하였으나 생존해 있었다. 정종욱은 택시 기사에게 도움을 청하여 구조되었다.
정인숙은 당시 출산한 아이의 아버지인 국무총리 정일권과 갈등관계에 있었고, 신민당은 이 사건의 배후로 정부 고위층의 개입 의혹을 제기했으나 유야무야 묻혀졌다.
사건에 대한 의혹은 지난 세월 계속됐고 현재도 진행형인지 모른다.
당시 사건 수사가 정인숙 여인 주변에 대해서는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오빠의 범행동기가 석연치 않았으며 중요한 범행현장인 사고차량은 사건발생 몇시간 만에 다른 곳으로 치워버렸다. 무엇보다 범행도구인 권총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정인숙의 오빠 정종욱은 19년의 형기를 마치고 출옥하고 난 뒤 "동생과 관계했던 고위층이 뒤를 봐준다고 했다는 아버지의 회유로 거짓자백을 했을 뿐, 집 앞에 있던 괴한들이 동생을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이런 숱한 의문점 때문에 정인숙 사건은 단순 살인사건이라는 수사기관의 발표에도 불구하고 ‘권력기관에 의한 살인’이라는 세간의 의혹을 잠재우지 못한 채 지금까지도 한국 현대사의 미스터리 사건으로 남아있다.
2010년 2월 중앙일보 측에서 어렵게 만난 오빠 정종욱은 "억울해서가 아니라면 수감생활까지 다 마치고 나와 '내가 쏘지 않았다'고 얘기하겠냐"며 그의 결백을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주장했다.
70대 중반에 들어선 그는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마지막으로 재심청구를 통해서라도 명예회복을 하고 싶다"며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정인숙은 당대 최고 권력층과 염문을 뿌린 것으로 알려지게 됐으며, 그녀의 숨겨진 아들의 아버지가 누구냐를 놓고 여러 설이 나돌면서 이 사건은 3공화국 최대의 스캔들로 발전했다.
이후 이야기는 중앙정보부가 김대중 후보의 신변을 보장하는 대신, 신민당은 정인숙 이슈를 제기하지 않기로 하는 밀약이 김상현과 이후락 사이에 있었다는 설이 나돌았다.
김상현 본인도 언론 인터뷰를 통해 이 사실을 인정했으니, 그가 밀약을 체결한 것은 사실이었으리라 볼 수 있다.
박 정권이 야당 후보를 암살하지 말란 보장이 없는 시절이었으니, 신변 안전을 보장받는 것도 '핫이슈'를 포기하는 것만큼 가치 있는 일이었을 수 있다.
1970년 3월 17일 마포구와 강변북로 일대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은, 박정희 정권의 타락상을 압축적으로 반영하는 사건이었다.
이것이 이슈가 됐다면 대선을 강타했을 법도 하지만, 당선 못지않게 목숨도 지켜야 했던 야당의 처지로 인해 이슈가 되지 못했다.
유신체제로 가는 박정희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었던 대선 이슈가 의외로 싱겁게 사라졌다.
세상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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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순 jwd3222@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