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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의 성지 '구로공단' 역사기행

기사승인 2015.11.10  16:0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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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민의 터전 위에 세워진 공단... 노동자의 피와 땀, 눈물이 곧 민주노총의 토대

▲ 전 민주노총 수석부위원장, 공공운수노조 공공연구노조 교육위원회 위원장

지난 2015년 11월 5일(목)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공공연구노조 교육위원회 구로 1~3공단 역사기행을 진행했다. 안내는 서울남부노동센터 문재훈 소장이 맡았다. 이글은 허영구 위원장의 구로공단 역사기행 참관기다. 

노동운동 성지 구로공단

1964년 구로 1공단에 한국수출산업공단이 설립됐다. 지금은 '산업, 기술, 문화가 융합하는 혁신산업단지 창조기관’을 슬로건으로 내건 한국산업단지공단(KICOX : KOREA Industrial Complex Corp.)으로 불리고 있다. 공단이 들어선 자리는 원래 안양천변 농지로 1번 국도와 경부선이 이곳을 경유했고 국유지가 많았다. 구로 1공단이 완성된 것은 1967년 박정희 정권에서다. 당시, 재일교포들의 요구를 수용해 보세가공(무관세 제조 수출) 공단으로 조성된 것이다. 

공단조성 과정에서 일세시대 때부터 이곳에서 농사를 짓던 농민들은 자신들의 터전에서 밀려나야만 했다. 이어 구로 2, 3 공단이 들어선 이후, 구로공단은 4반세기 동안 수많은 노동자들 특히, 수출산업역군으로서 ‘공순이’라 불리며 일했던 여성노동자들의 노동과 삶의 애환이 서려 있는 곳이 됐다. 결국,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착취당했던 노동자들의 분노는 1985년 ‘구로동맹파업’*으로 분출되고 말았다.

당시 사회분위기는 삼엄했다. 1985년 4월 대우자동차 투쟁과 5월의 미문화원 점거 농성투쟁이 있었고 이로 인해 공안 분위기가 조성됐다. 이런 분위기는 구로공단으로 이어졌고, 6월 22일 임투에서 파업을 주도한 대우어패럴 노조간부 3명이 구속됐다. 그리고 6월 24일 오전, 조합원들은 “단계적으로 깨지기보다 힘을 합해 함께 투쟁하자”며 파업에 돌입했다.

그날 오후 2시, 대우어패럴에 이어 효성물산과 가리봉전자, 선일섬유 등 민주노조들이 동맹파업을 시작했다. 이들은 “구속자 전원석방, 노동운동탄압중지, 민주노동운동을 짓밟는 모든 악법 즉각 철폐, 노동부장관 사퇴”를 요구하고 나섰다. 이어 주변 공장까지 이를 지지하며 농성투쟁과 가두투쟁 등을 전개했다. 

6월 29일에는 대우어패럴 농성장에 폭력단 500여 명이 들어와 파업을 강제해산시키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투쟁으로 43명이 구속, 38명 불구속, 47명 구류 그리고 1천500명의 노동자가 해고됐다. ‘구동파’, ‘구로동파’, ‘구로연대투쟁’으로 불리는 이 투쟁은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정치적 노동자 동맹파업이었다. 이때 해고된 노동자들은 블랙리스트에 올랐고, 전국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이들의 노력은 1987년 7,8,9월의 ‘노동자 대투쟁’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로써 구로공단은 노동운동의 성지, 메카가 되었다.

▲ 구로공단 역사기행단이 '구로공단 노동자 생활 체험관' 앞에서 기념촬영에 임하고 있다.

구로 1공단: 농민의 터전에서 ‘국정원 댓글녀 사건’의 무대로

‘구로공단 역사기행’에 나선 일행은 구로디지털역 1번 출구에서 모여 먼저 1공단 입구로 향했다. 예전의 공장 모습은 사라지고 높은 건물들이 보인다. 아파트형 공장이라 하지만 예전의 공장과는 전혀 달랐다. 공장보다는 오히려 시장에 가깝다. 국가로부터 거의 무상에 가깝게 임대를 받은 땅에 공장을 짓고 돈을 벌었던 기업주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대부분 지방으로 이전했거나 업종을 변경했다. 

2, 3공단 자리는 대부분 엘지(LG)가 소유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공단은 사실상 부동산 임대업으로 변했다. 지금은 테헤란로에 있었던 IT업종들이 구로산업단지로 많이 이전했다. 현재 공단 건물들을 소유한 본사 대부분은 강남에 있어 이 곳 구로구나 금천구에 세금을 내지 않는다.

지금 ‘코오롱 싸이언스 밸리’가 위치해 있는 1공단 자리에는 싸니전기가 있었다. 싸니전기는 지상 3층의 건물에 키 낮은 굴뚝형 공장의 모양을 한 대규모 전자부품제조회사였다. 싸니전기는 1992년 초에 소사장제를 도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IMF 외환위기 이전에도 이미 노동시장유연화와 구조조정의 바람이 시작되고 있었던 셈이다. 

한 공장에 3~6천 명씩 일했지만 지금은 옛날 얘기다. 12~13만 명의 노동자가 일하던 구로공단 시절과는 달리 지금의 디지털공단에서는 16~17만 명이 일한다. 물론 대부분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다.

우리 일행은 서울관악고용노동지청 건너편에 있는 한국산업단지공단 앞으로 향했다.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산업단지공단이다. 지금은 서울지역 디지털국가산업단지지만 박정희 정권 초기에는 재일교포들이 이곳에 투자했고, 국가는 이곳을 면세지역으로 정해 투자자들을 지원했다. 

지금 ‘에이스트윈타워’ 건물이 들어선 곳은 한때 밭이었다고 한다. 이곳에서도 40년 동안 농사를 짓던 농민들이 농토에서 밀려났다. 이때, 등기가 없었다는 이유로 농민에게 사기죄를 뒤집어씌우기까지 했다. ‘코오롱빌란트I’가 있는 자리에는 ‘삼경복장’이 있었고 그곳에도 노조가 있었다. ‘대륭포스트타워I’ 건물 자리엔 안테나를 생산하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임대업으로 바뀌었다. 이런 제품들은 이후 기륭전자에서 생산을 이어갔다. 

일행의 발길 한쪽에 위치한 ‘수출의 여신상’이 눈에 들어왔다. 1973년 세워졌다가 어느 시기 없어졌는데 2014년 9월 22일 복원 제막식을 했다. 어느새 서울관악노동지청 옆을 지났다. 이곳은 구로공단 시절 ‘대한광학’이 있었던 자리다. 노동자들의 투쟁이 격렬했던 곳인데, 지금은 흔적도 없고 낯설기까지 하다. 당시, 대한광학 노동자들이 초선이었던 이해찬 의원과 스크럼(scrum: 여럿이 팔을 끼고 대열을 이룸)을 짜고 “국회의원”이라고 외쳤지만 사측은 소방호스로 물을 뿌리며 몰아냈다고 한다. 

이어서, 일행의 발길은 ‘한국산업기술시험원’(KTL)을 지났다. 이 별관은 ‘구로동맹파업’에 참가했던 ‘가리봉전자’가 있었던 곳이다. 그리고 이곳은 2012년 12월 제18대 대통령선거 당시 발생했던 ‘국정원 댓글녀 사건’의 무대이기도 하다. 최근, 교육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TF팀’이 혜화동 ‘한국국제협력재단’(KOICA) 사무실에서 몰래 작업을 하다 들통이 났다던데, 한적한 공공기관은 때때로 국가권력의 음모가 꾸려지기는 장소로 활용되기도 한다. 

조금 지나자 나지막한 높이의 ‘만민중앙교회’가 보인다. 이곳은 원래 ‘마벨전자’ 자리였다. 산업단지 안에 교회가 들어선 모습을 보니 의아스러웠다. ‘오트론’ 공장이 있었던 자리를 끝으로 1공단 기행은 마무리됐다. 여기까지가 구로디지털 단지다.

구로 2공단: 아련한 추억 위로 우뚝 솟은 상업시설

구로 2공단은 오늘날 금천구 가산디지털단지다. 인도를 따라 걷다보니 ‘머리이야기’라는 미용실이 있다. 이 가게가 예전엔 사회과학서적을 판매하던 ‘공단서적’이었다. 가리봉 오거리를 중심으로 노학연대**가 이뤄졌고 많은 활동가들이 세상의 변혁을 꿈꿨던 곳. 거기엔 당연히 책과 학습이 있었을 테다. 진보적 사고와 꿋꿋한 실천은 바로 학습에서 비롯됐다.

어느새 일행은 가리봉 시장 골목에 들어섰다. 지금은 이주노동자 특히 중국인들이 많은 탓에 한자로 된 ‘양꼬치’ 음식점이 보인다. 가리봉 오거리는 당구장, 노래방 그리고 데모로 상징되었다고 한다. 노학연대 데모가 자주 있었던 거리다. 시장거리는 옛 모습 그대로다. 혹시 재개발되는 건 아닌지 물으니 권리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쉽지 않을 거라 한다.

가리봉 시장을 중심으로 밀집된 주택가는 예전의 분위기가 그대로다. 이곳은 가끔 영화의 배경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조선족이 많아 ‘동포거리’라고도 불린다. 지금은 이주노동자의 비율이 13~15% 정도 된다고 한다. 예전에 이곳은 노동자들의 생활공간이었다. 좁은 골목을 들어서자 감자탕 집이 보인다. 시인 송경동이 시로 기록한 곳으로 감자탕이 3천원이다. 탑골공원 뒤 허리우드극장 골목의 해장국 2천원처럼 정겹다.

2공단 사거리에 도착했다. 여느 서울의 거리처럼 높은 건물이 서 있고 복잡하다. 구로동맹파업의 중심지다. 1985년 6월 24일 구로동맹 파업의 포문을 연 대우어패럴 자리엔 ‘현대아울렛’ 건물이, 효성물산자리엔 ‘마리오아울렛’이 서 있다. 여기에 이마트까지, 어떻게 이런 상업시설이 공단지역에 들어설 수 있었는지 추적해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영화 <위로공단>은 말한다. 

“효성물산•가리봉전자•선일섬유가 즉각 파업에 돌입했고, 25일에는 남성전기•롬코리아가, 28일에는 부흥사 노조가 동맹파업에 가담함으로써 참여 노조 숫자는 총 10개, 노조원은 약 2천 5백여 명에 달했다.”라고.

또한, 동맹파업을 지지하는 노동자•학생•재야단체가 가리봉 5거리에서 가두사위를 벌였고, 농성해산 당일에는 10여 명의 학생들이 지붕을 넘어 대우어패럴 농성장에 합류하기도 했다. 

구로동맹 파업 당시 대우어패럴 노동자 파업 집회 사진엔 유일하게 검은 옷을 입은 여성노동자가 있었다. 이 분은 동맹파업을 앞두고 목욕재계 한 뒤 검은 옷을 입고 파업에 참가했다고 한다. 그 만큼 노동자 파업은 설레는 것 못지않게 엄숙한 의식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마리오아울렛 건물 앞에서는 시설관리 노동자가 투쟁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시설관리를 외주화하고 이에 반발하면 대기발령을 내고, 그러면 월급이 반토막 나고, 투쟁해서 복귀해도 인격모독 등으로 노동자를 괴롭혀 왔다고 한다. 8명에서 5명 정리해고, 지금은 단 한 명이 남아서 투쟁하고 있다. 회사는 업무방해에 따른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10년이 지나도 월급은 100만원 수준이다. 노동자들은 이렇게 고통을 받고 있다. 30년 전 구로동맹 파업 시절과 본질적으로 무엇이 달라졌는지 알 수 없다.

▲ 투쟁중인 마리오 아울렛 앞에서

구로 3공단: 노동자의 삶의 질은 달라진 게 없고

수출의 다리를 지나면서 2공단에서 3공단으로 넘어왔다. 수출의 다리 위에서 마리오아울렛 2관 건물이 보인다. 그 곳은 예전에 성경책을 만들던 공장 자리인데 성경책을 만들던 노동자들도 기업주들로부터 탄압을 받긴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3공단은 1, 2공단에 비해서 큰 공단이다. 한때 공단 수영장이었던 자리에 현대택배건물이 들어섰다. 공공시설들이 민간자본에 매각된 것이다.

1988년 설립돼 무선원격조종기를 생산했고, 구로공단의 전노협*** 마지막 사업장인 하이텍알씨디코리아(옛 태광하이텍)에 들렀다. 조합원들은 여전히 천막농성 중이다. 2002년부터 투쟁 해 온 사업장이다. 이미 회사는 1996년에 필리핀에 공장을 세웠다. 지금은 공장이전 저지투쟁을 하고 있다. 

회사는 공장 부지를 240억 원에 매각했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공장 부지의 실제가격은 더 높게 책정됐을 것으로 보인다. 공단이 들어설 때는 헐값으로 불하받았지만, 지금은 높은 가격으로 큰 차익을 얻고 있다. 현재 7명의 노동자가 투쟁하고 있다. 회사는 이들에게 3억5천만원짜리 회사로 가라고 하지만, 실제는 정리해고를 노리고 있다. 2002년부터 시작된 단협(단체협약)은 2011년 마무리되었고, 2014년부터 지금까지 새로운 단협이 진행 중이다. 최저임금사업장이다.

▲ 구로공단 전노협 마지막 사업장 하이텍알씨디코리아 노동자들과

순이네 집: 공단 울타리 장미꽃처럼 환하던

구로공단은 염색, 가발로 시작해 섬유봉제, 전기전자, 인쇄업으로 발전해 나갔고 최근까지 생산시설은 이전·폐쇄되었다. 1988년 전후로 부동산 투기붐을 타고 구로공단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빌딩과 사무공간이 대거 들어서 있다. 

예전의 공단시절 공장이 쉬는 휴일에는 적막한 곳이었지만 공단 울타리 장미꽃이 겉보기에는 낭만적이기도 했다고 한다. 1990년대 후반 공단은 황폐화됐다. 기존의 공장은 이전하고 IT산업이 들어서면서 노동자인지 사장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상황이 수십 년 지속되면서 노동운동 또한 약화됐다. 현재 구로공단의 노조조직률은 전국 최하위 수준이다. 현재 구로공단은 ‘갑을’관계가 아니라 삼성 등 여러 재벌의 6차 하청까지 ‘갑을병정무기’관계로 이어진다고 한다.

역사기행의 마지막 코스는 구로공단노동자생활체험관 금천 ‘순이네집’이다. 구로디지털역에서 출발해 가산디지털역 근처 순이네집까지 둘러보았다. 

구로공단시절의 기사나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영상관에서는 60~70년대 수출산업의 역군으로서 여성노동자들의 현실을 피상적으로나마 볼 수 있다. 지하에는 당시 여성노동자들이 살던 ‘쪽방’도 옛 모습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구로공단을 빼고 한국경제를 말할 수 없듯이 구로공단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을 빼고 민주노조운동을 말할 수 없다. 

▲ 구로공단 노동자 생활체험관에 전시된 사진들
▲ 1960-80년대 여공들이 생활했던 쪽방. 쪽방을 대신해 지금은 원룸 형태로 바뀌었지만 높은 임대료가 노동자를 더욱 고단하게 한다.

민주노총은 그냥 20년 전 우연히 창립된 게 아니다. 구로공단에서 장시간노동에 착취당했던 다수의 ‘순이’를 포함한 노동자들의 피와 땀, 눈물 그리고 그들의 투쟁이 토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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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동맹파업: 구로동맹파업(九老同盟罷業)은 1985년 6월 24일 구로공단의 노동조합들이 연대하여 벌인 파업이다. 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최초의 동맹파업이었다. (인용: 위키백과)

**노학연대: 노동자와 학생의 연대를 이르는 말. 2006년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발간한 '노동사회'(통권 제110호)에는 노학연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돼 있다. 
"생산관계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학생신분과 젊음이라는 진보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 청년들이, 소외된 노동자들에게 ‘의식적으로’ 연대하는 것"(손영우)

***전노협: 전국노동조합협의회의 약칭. 전노협은 1990년에 결성하여 1995년에 해산한 노동조합의 상위단체이다. 1995년 11월 11일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 결성된 후, 발전적 해소를 선언하며 해산됐다. (참고: 위키백과)

허영구 공공운수노조 공공연구노조 교육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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